“It is a question of learning hope.”
“중요한 것은 희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 『희망의 원리 The Principle of Hope』 중*
인간은 불확실한 삶 속에서도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하고 보이지 않는 바람에 끊임없이 형상을 부여해 왔습니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능동적인 힘으로 바라보았듯, 예술 또한 현실 너머의 가능성을 이미지로 불러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란에 부귀를, 학과 거북에 장수를, 호랑이에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았던 민화와 인간의 염원을 기호로 새긴 부적은 이러한 오래된 마음의 형식입니다. 시대마다 그 모습은 달라졌지만 그 안에는 삶이 평안하기를,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오기를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기원이 자리합니다.
이번 전시 《기원의 형상 Shape of a Wish》은 전통 민화와 부적의 길상(吉祥)을 동시대의 이미지로 변주해 온 김민수의 작업을 ‘기원(祈願)’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합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화조도와 책거리 등 민화의 도상을 탐구해 온 작가는 전통의 형식을 답습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욕망에 주목해 왔습니다. 과거 책거리의 책과 기물들이 학문과 출세, 물질적 풍요를 향한 당대의 욕망을 담았다면 작가의 작업에는 현대의 소비재와 일상의 사물들이 등장합니다. 《현대인의 부귀영화》에서 드러난 이러한 관심은 이후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톰과 같은 대중문화의 영웅을 오늘의 길상 이미지로 전환하는 “영웅부적”시리즈로 확장됩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영웅들은 오랫동안 힘과 용기, 정의와 보호를 상징하며 위기의 순간 우리를 지켜줄 존재에 대한 집단적 상상을 대신해 왔습니다. 김민수는 이러한 영웅의 이미지에서 액운을 막고 안녕을 기원했던 전통의 수호적 도상과의 접점을 발견합니다. 과거의 사람들이 호랑이와 신장(神將), 문자와 부적에 자신의 바람을 맡겼다면 그는 동시대인이 이미 알고 공유하는 영웅의 이미지 안에 새로운 기원의 의미를 새겨 넣습니다. 이는 전통과 팝 이미지를 단순히 병치하는 것이 아니라 민화가 시대의 삶과 욕망을 받아들이며 변화해 왔던 방식 자체를 현재로 이어가는 과정입니다.
김민수의 작업에서 기원의 의미는 제작 과정 그 자체로 이어집니다. 김민수는 매우 가는 세필로 수많은 선을 반복하며 영웅의 형상을 완성합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시각적 기억에서 이미지를 불러내 한 선씩 쌓아가는 과정은 동일한 영웅조차 매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며, 화면에 특유의 밀도와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선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마음을 새기는 수행의 흔적이 됩니다. 작가는 영웅부적 시리즈에 대해 “나 자신을 위한 기원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위한 기원”이라고 말합니다. 개인의 부귀와 행복에서 출발한 기원은 타인의 평안으로 확장되고, 우리를 구해줄 외부의 존재였던 영웅 역시 “불안과 욕망을 품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 자신”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김민수의 작업은 민화의 외형을 현대적으로 재현하기보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욕망을 새로운 도상으로 번역해 나가는 ‘과정’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화조도와 책거리에서 현대의 부귀영화로, 다시 “영웅부적”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의 모습은 변화했지만 그 아래에는 더 나은 삶을 바라는 하나의 마음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이번 전시 《기원의 형상》은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이 오늘의 이미지와 작가의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구체적인 형상을 얻는 회화적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독일의 철학자로 인간을 현재에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바라보았다. 그의 대표 저서 『희망의 원리』에서 희망을 수동적인 기대가 아닌 미래를 향한 능동적인 힘으로 설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