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의 회화는 '사는 일 - 삶의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하루를 보내며 느낀 몸의 감각, 가족과 반려동물,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쌓이는 미세한 기억을 화면 위에 다시 써내려갑니다. 하루의 기록이면서 캔버스 위에서 새로이 탄생한 그의 그림은 관찰과 상상의 언어가 교차하고 평범한 사물들이 사적인 문장처럼 배열되어 현실과 꿈의 경계가 서서히 흐려집니다. 작가의 회화는 꾸준히 가꿔온 '정원'과도 같이 살아있는 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의 초기 작업은 도시의 옥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옥상을 일종의 실험실로 삼아 화면을 몇 개의 색면을 분할하고 그사이에 사물과 그림자의 잔상을 놓아둠으로써 사진과 같은 정확한 묘사보다 배치와 간격, 장면과 함께 멈춰있는 시간의 리듬을 먼저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물은 온전히 나타나지 않고 관계를 드러내는 방식의 분할과 간접 표상은 이후 박형진의 오랜 문법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연작 〈일기〉의 문법은 이후 〈정원〉 연작으로 이어지며 박형진 회화의 중요한 키워드인 장면과 장면을 잇는 서사적 리듬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 결혼과 출산, 도시에서 산골 마을 풍기로의 이주를 통해 삶의 무게중심이 이동한 박형진은 생활공간 자체가 주제가 됩니다. 〈신생〉, 〈베이비 파파〉 연작을 통해 돌봄의 감각을 서정과 유머로 재해석되고 과수원과 텃밭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가 싹트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작품에 '사과'의 등장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대형 캔버스에 사과를 나열해 공간의 호흡을 탐색하고, '사과맨'이라는 의인화된 캐릭터를 등장시켜 일상의 행위를 가볍게 비틀었습니다. 이 시기의 작업은 사실적 묘사와 도상적 배열이 겹쳐져 가정과 작업의 경계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생활이 곧 작업이자 작업이 생활의 지속이라는 명제가 분명해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확대와 축소의 유머가 화면에 등장하면서 과장된 스케일을 통해 동화적 정서를 불러오면서도 일상의 사물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평면을 분할하고 도상의 정교하게 배열하여 '확대된 오브제 + 점경 인물'의 구도를 통해 평범한 하루가 기념적 사건으로 변환되는 순간을 담았습니다.
2010년대 초중반의 작업에서 '정원'은 누군가의 부재를 품은 채 여전히 자라는 세계로 그려집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녹색의 큰 화면에 원추형 나무와 소박한 조경, 곳곳에 놓인 장난감과 소품은 정원을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기억의 무대로 바꿔놓았습니다. 이 시기에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아이'와 '개'의 도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포옹과 손짓, 몸을 기대는 제스쳐가 화면의 정조를 결정하고, 관람자는 그들의 속도로 정원을 거닐게 됩니다. 이 시기 박형진의 회화는 감정의 미세한 결을 물성으로 밀착시키는 방식(색면의 겹침, 붓결의 진폭, 캐릭터의 시선)으로 무르익습니다. 연속된 개인전을 거쳐 도상이 더욱 정제된 박형진의 작업은 캐릭터와 식물의 형태는 단단해지고 크기, 비례의 왜곡과 평면 분할이 보다 명료한 장치로 공고화됩니다. 화면은 보다 간결해졌지만, 색면과 질감의 대비가 앞선 시기의 서정과 유머를 균형 있게 품어내어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되 서술은 절제하는 방식을 통해 일상과 동화의 경계를 더욱 형식적으로 다지는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작업은 2024년 개인전 〈Bittersweet〉에서 전환점을 맞습니다. 파랑새 구조의 경험을 '새랑' (새와 사랑의 합성어) 연작으로 확장하고, 작가 자신의 분신인 '타이니키즈'를 통해 돌봄과 공존의 감정을 구체화했습니다. 서정적 장면을 늘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위험에 처한 동물을 구하는 행위로 이어지는 그의 작업은 삶의 실천과 다시 한번 맞닿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Bittersweet〉 연작과 함께 신작 〈마음의 정원 - 오후 3시〉를 선보입니다. 하루 중 오후 3시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면서, 심기일전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동물들과 함께하는 〈낮잠〉, 〈꽃 세 송이〉, 〈단잠〉, 〈허그〉, 〈짹〉 등의 작업은 모든 생명체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 가족의 일원으로 서로 고독과 외로움,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큰 낙이 되고 의지가 되는 관계와 교감을 통해 희생과 사랑, 배려와 관계에 대한 작가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기존의 박형진의 작업 스타일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심경을 모노톤으로 그려낸 〈Blue Grey Drawing〉 연작은 컬러가 배제된 블루 그레이 드로잉을 통해 또 다른 힘을 보여줍니다. 또한 작가가 좋아하는 것, 인상 깊었던 그림책의 한 장면 등 사소하지만 소중한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순간들을 작은 캔버스에 차곡차곡 그린 삶의 퍼즐 조각과도 같은 드로잉 〈Small Pieces Painting〉 시리즈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박형진의 '마음의 정원'은 개인의 서사를 넘어 '함께 자라는 정원'을 꿈꾸게 합니다. 옥상에서 시작된 분할의 언어는 과수원과 정원으로 옮겨 심어졌고, 정원은 상실과 돌봄을 품으면서 성장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의 작품 속 도상은 단정해지고 색과 질감은 더 절제되었지만, 일상의 반복 속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변화, 돌봄이 남기는 흔적, 손과 손이 맞닿는 순간의 온기와 같은 것들을 캔버스 위에서 확장되며 현재형으로 지속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